glory

( 2019-09-22 04:41:30 , Hit : 1141 )

gamguk2.jpg (203.6 KB), Download : 3

기억의 미학: 물고기는 절대 눈을 감지 않습니다

“21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얼굴”이라는 찬사를 받는 이탈리아의 국민작가, 에리 데 루카(Erri de Luca)가 2011년에 발표한 그의 대표작,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는 “열 살 소년이 자연과 문학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터득해 가는 과정을 시적 언어로 빚어낸” 자전적 성장소설로 평가받습니다. 이 소설은 세상과 인간 군상이 지닌 아름다움과 잔인함을 서정시처럼 그려주면서 한 소년이 사랑과 정의, 수치가 무엇인지를 터득해 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정제된 언어를 통해 “마치 가로세로 낱말 퍼즐의 칸을 채울 때처럼 고민하며 선택한 단어들로... 파란 하늘 아래의 여름 섬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탈리아 남부의 정서”를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년은 엄마와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나폴리 근교의 작은 섬의 한 해안마을을 찾아 왔습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주인공은 책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와 어른들이 자행하는 악의 실체를 알아가면서 세상과 사람에 대해 냉소적이고, 주변의 소란스러운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도시의 번거로움을 벗어나 작은 해안마을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소년은 해변에서 또래 소녀를 만납니다. 그는 또 다른 생명력으로 가득한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사랑의 감정에 눈을 뜹니다.
그 소녀를 좋아했던 또래 남자아이 세 명은 그 소년을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소년은 폭행을 당해 큰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합니다. 소년은 그 폭행 사건을 통해 자신의 유아기 몸과 결별하는 성장통이라고 생각하지만 분노한 소녀는 ‘정의’의 이름으로 세 명의 소년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 세 명의 아이들이 자기를 좋아하게 만든 후에 서로 싸우게 만듭니다. 싸우다가 서로 상처를 입은 쓰러져 있는 아이들 앞에서 소녀는 주인공 소년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며, 너희들은 내게 별 의미가 없는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그 후 소년과 소녀는 멀리 떠나게 되면서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후, 60세가 된 주인공은 옛 기억을 떠올립니다. 폭행을 당해 병원에 누워있을 때 소녀의 병문안을 받고 상처가 아물어가는 경험과 정의를 세워가려던 그 소녀의 담대함도 떠올리고, 어릴 적 경험한 그 여름의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눈부셨던 순간의 기억을 살려냅니다.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사랑을 받는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눈을 감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육순을 넘긴 소년은 그 사랑의 기억을 가슴에 담습니다.
인생은 따뜻한 기억을 통해 세워지고, 아름다워집니다. 기억하는 것과 기억되는 것, 그 양극 사이에서 그의 가치와 삶이 결정됩니다. 작품 “갈채”로 195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나중 모나코 왕비가 되었던 그레이스 켈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한 여자”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이유일 것이고, 한 작가는 인생길에서 경험한 사건과 자기 이야기를 통해 듣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기억을 불러일으키고자 했을 것입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본인의 스승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박사는 “신앙공동체는 기억공동체”라고 주장합니다. 강의 때마다 종종 읽어주시던 신명기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득한 옛날을 회상해 보아라. 선조 대대로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보아라. 너희 아비에게 물어보아라. 그가 가르쳐주리라.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라. 그들이 일러 주리라... 야곱을 만나신 것은 광야에서였다. 스산한 울음소리만이 들려오는 빈 들판에서 만나, 감싸주시고, 키워주시며, 당신의 눈동자처럼 아껴주셨다”(신 32:7, 10, 공동번역).
제국주의 부활을 꾀하며 일본 아베 정권이 감행한 경제 보복 때문에 온 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우리는 올해로 조국 광복 74주년을 맞습니다. 경제 보복 행위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제2의 침략과 같습니다. 문득, 죽은 듯 잊고 살려고 몸부림치다가 숨기고 싶던 그 부끄러움까지 드러내 기억하고 증언한 한 위안부의 이야기를 담아낸 김창현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 민족의 과거를 떠올리게 됩니다. “봄은 왔건만 틔우지 못한 싹들은/ 흙 위에서 스러지고/ 여린 고사리는 짓밟히었다// 차마 꿈조차 꾸어 보지도 못한/ 꽃봉오리 소녀는/ 들개의 더러운 굴속에 물려가/ 검은 뱀과 붉은 뱀에게 무명 저고리 속의/ 파릇한 젖가슴을 유린당하고/ 영혼의 자유마저도 구속당했다// 피우지도 못하고 시들은 꽃망울/ 멈추어버린 기억은/ 고향 집의 뒤뜰/ 복사꽃 나무가지 위에 걸쳐두고/ 참으로 먼 길을/ 피고름 흘리며 생채기로 떠돌았다// ...손가락질 받아도 미움조차 모르고/ 풀뿌리 나무뿌리/ 닥치는 대로 먹으면서도/ 모진 생명의 끈을 결코 놓을 수는 없었다// 검은 씨앗이 푸르게 자라나/ 마음껏 꽃피우며 살아갈/ 내일을 위하여/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살아도 사는 줄 몰랐다// 서쪽 하늘이 뉘엿거리는 이제사/ 양귀비꽃처럼 피어난/ 고사리 소녀는/ 세상의 작은 관심이/ 미웁고 서러워 통곡을 한다// 꽃잎들은 하나둘 떨어지고/ 얼마 남지 않은 황혼 녘/ 차마 다 말할 수 없었던/ 그날의 얘기들/ 치욕스런 그 만행들을// 늦었지만 진하디진한 향기로/ 세상에 전한/ 가슴이 저린 이야기들/ 가슴을 쥐어뜯는 통한의 역사를/ 세상이 잊을까 두려워 눈을 감을 수 없다”(이창현, “늙어 핀 꽃” 일부).
“늦었지만 진하디진한 향기로 세상에 전한 가슴 저린 이야기들” 풀어 놓으며 “세상이 잊을까 두려워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앞 세대가 아름다운 이유, 지난 7월 17일, 광주 광덕고 학생회가 교내 태극기 상설전시관 앞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과거 반성 없는 일본제품 불매한다, 일제(日製)의 사용은 일제(日帝)로의 회귀이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외치던 우리 젊은이들의 기개가 자랑스러운 이유, 그건 기억하려는 치열한 그들의 몸부림 때문입니다. 잊지 않으려 눈을 감지 않을 때 그 기억의 자리는 아름답습니다.

-<동안>, 동안교회 큐티집 (2019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