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ry

( 2019-09-22 04:27:13 , Hit : 1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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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기만 한데

얼마 전, 우연히 익숙하지 않은 한 시인의 시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이력이 독특했습니다. 서울의 어느 유명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한 방송사 기자로 출발하여, 부장, 국장을 거쳐 지방 지국의 사장까지 역임한 분이었습니다. 서슬 퍼렇던 유신 치하 대학 시절, “어두운 세상”이란 시를 대학신문에 발표했다가 고초를 당했고, 졸업 후엔 기자가 되어 연일 유신철폐를 외치는 후배들의 거리시위를 취재했습니다. 시위하던 후배들은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고, 양심을 따라 쓴 기사는 보도 통제로 내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시대의 아픔과 고민을 담아 “젊은 기자의 초상”이라는 시를 썼지만 어디에도 발표할 수 없었습니다. “부끄러움 속에 휘갈겨 쓴 이 시는 물론 발표할 곳도 없었고 그럴 만한 배짱도 없었다. 나는 시를 잃었고 시도 나를 버렸다.” 그리고 그는 시를 놓아버렸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 아내의 암 투병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다시 시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쓴 시를 모아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을 발간했습니다. 거기에는 떠난 아내에 대한 가슴 저미는 연가로 가득했습니다. 2008년, 말기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아내는 2011년에 기어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움에 몸을 떠는 시인의 담백하고 진솔한 고백을 읽다 보면 ‘지금’이라는 시간의 소중함과 지금 내 곁에, 나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습니다. 국내 생존 화가 중 그 작품이 최고 경매가를 기록하였다는 김형근 화백의 그림과 함께 쓴 김상기 시인의 『아내의 묘비명』(휴먼앤북스, 2011)이란 제목의 시집입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시인은 서울 집에서 대전에 있는 아내의 무덤까지 4년 동안 찾아다녔답니다. 아내 무덤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해가 저물면 돌아오곤 했는데, 때로는 아들 흉도 보고, 요즘엔 왜 꿈에도 보이지 않느냐고 생떼를 쓰기도 하고, 때론 깔깔대고 웃기도 하고 눈시울을 붉히며 돌아올 때도 있었답니다. 살아있을 때도 떠난 다음에도 그리움과 아픔은 계속되었습니다. “아내가 많이 아프다/ 눈 꼭 감고 참고 있다가/ 문득 혼잣말처럼 묻는다/ ‘날 사랑해?’// 나는 화들짝 놀라 대답한다/ ‘그럼! 사랑하고말고!’// 아내가 생전 하지 않던 청을 한다/ ‘나 한 번 안아 줄래?’// 나는 고꾸라지듯 아내를 안는다/ 목구멍 속으로 비명이 터진다/ ‘여보! 제발 가지 마!’// 이윽고 아내가 가만히 나를 민다/ ‘이제 됐어…’/ 여간해선 울지 않는 아내 눈이 흠뻑 젖어 있다// 장례식 날 관 뚜껑을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내를 안았다/ 얼어붙은 눈물/ 얼음 같은 체온// 사람들이 나를 떼어 놓는다/ 나는 아내를 보낸다/ 내 남은 삶과 꿈도 함께 보낸다.” (“고별,” 시 전문).

젊은 날에 시집 와 자신의 모든 꿈을 내려놓고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 양육에만 전념하던 아내가 45살에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후부턴 남편이 뒷바라지를 도맡았답니다.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그렇게 다섯 해를 함께 걷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심한 아내는 죽음 앞에서도 많은 걸 준비하고는 했는데,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대부분이 살아남아 있을 남편과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떠나기 전/ 나를 백화점에 끌고 갔다/ 여름옷 겨울옷 티셔츠에 오리털 파카까지/ ‘궁상맞게 살지 마!’”(“유품,” 시 일부).

그렇게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았던 아내는 남편에게 마지막 한 가지 부탁을 했답니다. 그리하겠노라 약속을 했지만, 남편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냈습니다. ‘갈 때가 되면 알려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주치의의 만류도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떠날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아내를 빨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던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의사였던 아들도, 처남도, 평생 함께 걸었던 남편조차도 그 밤이 마지막 밤이라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집에 갔다 올게’/ 맹추 같은 나/ ‘...왜?’/ 힘없는 질문// ‘아침에 다시 올게’/ 한 치 앞도 못 보는 나/ ...가.../ 잦아드는 목소리/ 아내의 마지막 음성” (“유언,” 시 전문).

아내가 남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가...’라는 한 마디였습니다. 아내는 가라고 했지만 남편은 떠나지 못했습니다. 일찍 결혼하여 자신에게 잡혀 하늘을 날지 못한 아내의 젊음과 “자식들에게 묶여 꽃피우지 못한” 아내의 꿈을 늦게나마 조금이라고 보상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미안함과 그리움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렇게 4년을 살다가 시인도 2015년 늦여름, 그렇게 그리워했던 아내 곁으로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 아내와 합장묘를 준비하면서 시인은 묘지 앞에 써넣을 묘비명을 미리 썼습니다. “목숨이 백 년은/ 푸르를 줄 알았다// 사랑은 천 년도/ 짧을 것만 같았다// 차운 비 한 서슬에/ 놀라 깨니 적막한 꿈// 꽃향기 새소리도/ 무명(無明)으로 쓸려간다// 깊은 강 건너/ 잊혀진 내 무덤가// 그리운 그대 음성/ 바람결에 뒤채인다.”(“연가-아내의 묘비명,” 시 전문). 시인은 이 땅에 못다 한 사랑,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담아 시의 제목을 ‘연가’라고 했고, 부제로 ‘아내의 묘비명’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누구와 함께 살고 죽어야 하는가를 비로소 알았다”고 했고, 평생을 사랑하며 살았지만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 가슴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랑의 노래들을 들으며 내가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9월은 가장 아름다운 때이지만 떠남을 생각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태주 시인은 9월을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하는 때로, “이제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되는” 때로 규정하면서 오래오래 그리고 더 많이 기다려주고, 사랑하라고 권합니다. 가슴 저리는 사랑 이야기와 “목숨이 백 년은 푸르를 줄 알았다”는 한 시인의 후회에 찬 외침을 들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기만 한데...’

-<동안>, 동안교회 큐티집 (2019년 9월호)